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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케 요시타카 (18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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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타케 요시타카 (1825년)는 일본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쳐 활동한 무사이다. 소마 마스다네의 아들로 태어나, 구보타 신덴 번주 사타케 요시즈미의 양자가 된 후 구보타 번의 12대 번주가 되었다.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쇼나이 번과 아이즈 번을 정벌했으며, 판적봉환으로 지사가 되었다. 폐번치현 이후 도쿄로 이주하였으며, 후작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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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케 요시타카 (1825년)
인물 정보
씨명상마 씨→사타케 씨
사타케 요시타카
로마자 표기Satake Yoshitaka
이명가메사부로, 세이자부로, 사콘(통칭)
기본 정보
시대에도 시대 후기 - 메이지 시대
출생문정 8년 7월 27일 (1825년9월 9일)
사망메이지 17년 (1884년) 10월 23일 (만 59세)
개명상마 무네타네→사타케 요시카쿠→요시나리→요시타카
시호서안사전전중서장예양신대거사
묘소도쿄도 아사쿠사의 총천사→아키타시천덕사로 개장
관위종5위하・좌근위장감, 종4위하・좌중장, 우경대부, 종3위, 후작, 증정2위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요시→이에사다→이에모치→요시노부→메이지 천황
데와이와사키 번주→데와 구보타 번주
가족배우자: 다키, 증명자, 아오야마 다다요시의 딸
자녀마사코, 환자, 요시오 등
양자요시치카, 요시나가
가계
아버지상마 마스타네
어머니이케다 씨
양아버지사타케 요시즈미→사타케 요시치카
형제자매상마 미쓰타네, 요시노리, 요시타카, 요시치카, 오카다 야스타네, 아오야마 유키노리 계실, 이토코, 상마 다네나오실, 유지, 상마 다네사다실

2. 생애

분세이 8년(1825년), 소마 나카무라번소마 마스타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덴포 10년(1839년)에 성인식을 하고 '''소마 무네타네'''(相馬宗胤일본어)라 이름하였고, 가에이 2년(1849년), 아키타 신덴 번주 사타케 요시즈미의 양자가 되면서 '''사타케 요시자네'''(佐竹義核일본어)로 개명했다. 그해 10월 26일, 양부 요시즈미가 은거하면서 가문을 계승하고 아키타 신덴 번의 7대 번주가 되었다.

안세이 4년(1857년) 7월 1일, 본가인 구보타 번의 번주 사타케 요시치카가 병사하자, 같은 해 7월 20일에 그의 양자로 들어가 아키타 사타케 가문을 계승하여 구보타 번의 번주가 되었다. 그에 따라 이름도 '''사타케 요시타카'''(佐竹義就일본어)로 개명하였다. 분큐 2년(1862년)에는 요시타카(義堯)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다.

메이지 2년(1869년) 6월 17일, 판적봉환으로 요시타카는 구보타 번 지사가 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으로 면직되었고 도쿄로 이사하였다. 이듬해 8월 2일에 은거하고 양자 사타케 요시나오에게 가문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메이지 14년(1881년)에 요시타카는 요시나오를 은퇴시키고 다시 가문을 상속했다. 메이지 17년(1884년)에는 후작이 되었으며, 그 직후 병으로 사망하였다. 후작 작위는 둘째 아들 요시나리가 이어받았다.

사타케 요시타카 공 동상 (센슈 공원)

2. 1. 출생과 가계

분세이 8년(1825년) 7월 27일, 무쓰국소마 나카무라 번주 소마 마스다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타케 가문과 소마 가문은 서로 양자를 주고받는 등 친척 관계였으며, 요시타카는 구보타 번 3대 번주 사타케 요시토모의 직계 자손에 해당한다.[1]

덴포 10년(1839년)에 원복하여, '''소마 무네타네'''라고 칭했다. 가에이 2년(1849년) 2월 26일, 구보타 신덴 번(후의 이와사키 번)주 사타케 요시즈미의 양자가 되어 '''사타케 요시자네'''로 개명했다. 4월 2일, 양부 요시즈미의 딸과 결혼했으며, 4월 26일에는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알현했다.

2. 2. 아키타 신덴 번주 시대

덴포 10년(1839년)에 성인식을 하고 '''소마 무네타네'''(相馬宗胤일본어)라고 칭했다. 가에이 2년(1849년) 아키타 신덴 번주 사타케 요시즈미의 양자가 되면서 '''사타케 요시자네'''(佐竹義核일본어)로 개명했다. 그해 10월 26일, 양부 요시즈미의 은거로 아키타 신덴 번의 7대 번주가 되었다.

2. 3. 구보타 번주 시대

안세이 4년(1857년) 7월 1일, 본가인 구보타 번의 번주 사타케 요시치카가 병사하자, 같은 해 7월 20일에 그의 양자로 들어가 아키타 사타케 가문을 계승하여 구보타 번의 번주가 되었다. 그에 따라 이름도 '''사타케 요시타카'''(佐竹義就일본어)로 개명하였다. 아키타 신덴 번은 동생인 사타케 요시쓰마가 상속했다.[1] 그해 12월에 종4위하, 시종, 우쿄노다이부 관직을 받았다.

안세이 6년(1859년) 5월, 요시타카가 아키타로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러시아 기선이 오가반도 인근에 출현하여 영내 백성들을 놀라게 했다. 요시타카는 양이론이 거세게 일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선원들의 땔감 요청을 허락했다. 또 번의 재정 악화를 막고, 서둘러 인사 쇄신을 비롯한 번정 개혁을 시행했다. 스스로 모범을 보여 검약에 힘썼고, 문무를 장려했다.

분큐 2년(1862년)에는 요시타카(義堯)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해 4월에 에도로, 이듬해 1월에는 교토로 상경했다. 당시 교토에서는 양이론 논의가 활발해져 조정에서는 요시타카에게 교토 경비를 요청했다. 한편 막부에서도 에도 성으로 들어올 것을 요구받았다. 양쪽의 요청에 고민하던 요시타카는 막부의 요청을 거절하고, 조정에서 또다시 요청이 들어오자 도무라 요시카타를 대리인으로 삼아 분큐 3년(1863년) 8월에 파견했다. 겐지 원년(1864년)에는 교토 경비를 위한 재원으로 2만 냥의 신찰 발행과 3만 5천 석의 미곡 조달에 나섰다.

요시타카는 게이오 2년(1866년) 6월부터 9월까지 교토 방위 당번이었으나, 지병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대타로 오노 오카에몬이 경비를 담당했다. 8월에는 에도를 거쳐 교토로 올라갈 예정이었으나 에도에 도착하자 다시 병이 도져 결국 눌러앉았다. 게이오 3년에는 지난해의 흉작으로 괴로워하는 영내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영지 복귀를 신청했으나 허가받지 못했고, 그 와중에 지병이 재발하였다. 에도에 머무르던 사이 왕정복고 대호령이 선포되었다. 이듬해 1월에 번으로 돌아가 중신 회의를 열어 상락을 결정하고, 대리인 오노 오카에몬을 교토로 보냈다.

2. 4. 보신 전쟁

게이오 4년(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신정부는 요시타카에게 4월 6일 쇼나이 정토, 4월 27일 아이즈 정토를 명했다. 같은 해 윤4월 9일, 오우 진무 부총독 사와 다메카즈는 쇼나이 정토 출병 지연을 질책했다. 같은 해 5월, 사와는 사초 번병과 함께 구보타 번령으로 철수했다. 사와 등이 성에 머무르면 번내 존왕파를 자극할 수 있으므로, 요시타카를 포함한 번 고관들은 사와 등을 히로사키 번으로 몰아내려 했지만, 번 경계가 봉쇄되어 실패했고, 사와 등은 영내에 머물게 되었다. 같은 해 7월, 오우 진무 총독 구조 미치타카 등이 구보타 번령에 도착했다. 센다이 번의 사자가 그 수용을 책망하자, 존왕파 번사가 사자를 살해하여 구보타 번은 신정부에 가담하게 된다(아키타 전쟁). 보신 전쟁은 메이지 2년(1869년)에 종결되었고, 같은 해 2월 13일, 신정부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내 상황을 고려하여 20만을 하사했다.[1]

2. 5. 메이지 시대

1869년(메이지 2년) 판적봉환으로 구보타 번 지사가 되었다.[1]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으로 면직되었고, 이후 도쿄로 이주했다.[1] 1884년(메이지 17년) 후작이 되었으나,[1] 그 직후 병으로 사망하였다.[1] 후작 작위는 둘째 아들 요시나리가 이어받았다.[1]

3. 가계

구 분내용
아버지소마 마스다네(1796 ~ 1845)
어머니이케다 씨 (측실)
양아버지사타케 요시즈미(1802 ~ 1856)
양자사타케 요시무츠(1839 ~ 1857)
정실타키 - 사타케 요시즈미의 장녀
계실조메이코(쇼신인, 신세이인)(? ~ 1859) - 도도 다카노부의 딸
계계실아오야마 타다요시의 딸
측실미우라 씨
장녀마사코 (1858 ~ 1903) - 사타케 요시나가 정실
측실엔도 씨
차녀칸코 (1860 ~ ?) - 사타케 요시노리 정실
측실오오츠카 씨
차남요시오(1867 ~ 1915)
생모 불명삼남 : 이소와카 (?-1875)
양자


4. 일화

세 번째 정실은 단바 사사야마 번주 아오야마 타다요시의 딸로, 다이묘 간의 결혼으로는 드물게 맞선을 통해 이루어졌다. 요시타카는 맞선에서 딸의 미모에 반해 결혼을 승낙했다. 그러나 가마를 타고 온 신부는 맞선에서 본 여성과 달리 추녀였기에, 타다요시에게 연유를 물었다. 타다요시는 딸이 못생겨 혼담 상대를 찾지 못해 맞선 때 대역을 세웠다고실토했다. 요시타카는 어쩔 수 없이 추녀를 정실로 맞았으나, 9일 만에 이유를 들어 이혼했다.

요시타카는 천식을 앓고 있었는데, 번의(측근 의사) 후지이 쇼테이지(후지이 겐엔의 자손)가 란가쿠 지식을 바탕으로 치료약을 개량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류카쿠산이다.[4]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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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작품

와라비좌 뮤지컬 '류카쿠산 Presents・고혼!이라고 하면' (2022년, 각본·연출: 마키노 노조미, 사타케 요시카즈, 요시타카 역: 우치다 카츠유키)[6]

참조

[1] 문서 この字は「よしなり」とも読めるが、最終的に名乗る「義堯」と同じ読みと思われる。「就」を「たか」と読む例は[[長州藩|萩藩]]主の[[毛利重就]]およびその偏諱を受けた家臣たちなどに見られる。
[2] 문서 この時には、義核(義堯)の従兄弟にあたる[[佐竹義祚]](初め相馬博胤)が息子・[[佐竹義寿|義寿]]の久保田新田藩相続を実家の相馬家に働きかける出来事が起きたが、のちに義祚は[[戸村義效]]へお預けの身になる。
[3] 웹사이트 千秋公園佐竹義堯公銅像 https://www.city.aki[...] 秋田市 2024-12-21
[4] 웹사이트 グッドデザイン賞2016 http://www.g-mark.or[...]
[5] 간행물 官報 1884-07-08
[6] 뉴스 【わらび劇場4/9開幕】龍角散Presentsミュージカル「ゴホン!といえば」公演詳細発表! https://www.warabi.o[...] わらび座・あきた芸術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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